대지와 인문의 느낌/철학 그 이론들

[스크랩] <푸른광장>이승엽의 표정

daseut 2006. 9. 21. 17:20
<푸른광장>
이승엽의 표정
내가 배터 박스에 들어선 이승엽 선수의 표정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어느 식당 대형 디지털TV에서였다. 음식을 주문하고 일행과 대화하던 중 무심히 시선을 던진 TV에 때마침 방망이를 어깨 위로 치켜든 이승엽 선수가 비쳐든 것이다. 그 타석에서 그는 헛스윙도 하고 파울볼도 날리고 하다가 평범한 땅볼로 아웃됐다.

그러나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공을 치기 위해 배트를 들고 투수를 향해 선 그의 표정이었다. 배트를 휘두르기 직전 아주 짧은 순간 클로즈업으로 TV를 가득 채운 뒤 이내 사라진 그의 표정, 그것은 이승엽이 국내에서 활약하던 시절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 표정이 아니었다. 방망이의 각도, 리드미컬하게 박자를 넣어 흔드는 몸 등 타격자세는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만은 확연히, 아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투수를 압도하는 승기나 비범한 카리스마 따위의 언어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구태여 들라면 차라리 깊이, 그늘, 신비 등등의 어휘가 더 적실할 것 같았다. 그렇다. 이승엽이 시인이나 철학자는 아니다. 나도 이런 단어들이 야구선수의 표정을 서술하는 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그때 그 식당에서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 야구선수의 표정을 시인의 그것으로 만들어놓았던가. 이것은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리라. 그냥 ‘표정 자체는 언제나 신비’ 라고 했던 레비나스의 말로 대강 넘어가면 편할 것 같다. 그에 따르면 표정은 감정에 대응하는 안면근육의 움직임도 아니고, 의욕이 표현해내는 이목구비의 새로운 배치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 안에서 타자를 만나면서 고유하게 형성되어간 영혼의 증언이라는 것이다.

3년전 이승엽 선수가 일본으로 진출할 무렵, 그에게 쏠리는 내외의 시선으로 그의 발걸음이 마냥 경쾌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실력 있는 한국 출신 야구선수가 아니었으니까. 한국 야구판을 평정한 홈런왕이었고, 아시아 홈런기록의 보유자였고, 한국 타자 중 최고 연봉자였다. 요컨대 그는 한국 야구의 자랑스러운 상징 기표였던 것이다.

이승엽에게는 이종범이라는 거울이 있었다. 이종범 선수가 그에 앞서 몇해 전에 일본 야구판으로 뛰어들었다. 그 불세출의 기량을 마음껏 과시하며 일본 야구선수들을 완전히 주눅들게 만들어서 한국 야구 수준을 열도에 알려주길 기대했던 이 타격천재, 도루천재, 수비천재는 그곳에서 타격 2할대의, 수준을 밑도는 초라한 성적표로 더그아웃을 지키다가 결국 귀국길에 올랐다.

이 전말을 기억하는 일본 야구인들은 이승엽이 일본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이런 시나리오를 적어놓고 있지 않았을까. 한국의 홈런왕, 자칭 아시아 홈런기록보유자 이승엽. 그러나 이곳에서의 성적. 타율은 2할대 초반, 홈런은 10개 안팎. 후보백업선수로 전전하던 이 동네 골목대장은 2년 뒤 이종범이 돌아갈 때 탔던 그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다.

이승엽이 이런 시나리오를 몰랐을 리 없다. 아니 한시도 이것을 잊지 않았으리라. 더그아웃을 지키는 그 많은 시간, 아니 밥 먹고, 잠 잘 때조차 이 악몽같은 시나리오를 의식에서 부려놓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려는 것은 그가 내로라하는 일본 프로야구 에이스 투수들을 두들겨 홈런을 마흔 개씩이나 날려서가 아니다. 그는 조국 팬들의 기대감과 싸웠고, 우물안 개구리라고 얕보는 일본인들의 시선과 싸웠고, 혁혁한 전통으로 위대한 스타들을 배출해왔다는 저들의 배타적 자부심들과 싸웠고, 앞에 선 선수들과 싸웠고, 그들의 꼼수와 싸웠고, 보이지 않는 온갖 형태의 견제들과 싸웠고, 그래서 이겼다. 이런 싸움에서의 승자에게 ‘영웅’은 마땅한 계관이다. 내가 식당에서 보았던 그 표정은 그늘과 깊이를 지닌 이 영웅에게서 더 이상 눌러둘 수 없는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카리스마가 아니었을까.

그가 만일 여느 일본선수처럼 단지 마운드의 투수하고만 승부하는 타자였다면 결단코 그런 표정의 주인공일 수 없었으리라. 그는 홈런왕인가. 아시아의 슬러거인가. 요미우리의 간판타자인가. 내가 볼 때 그저 ‘고독한 실존의 투사’ 로 족하다. 그때 그의 표정이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왕주 / 부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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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게재 일자 2006/09/21
출처 : 삶, 무의 존재 존재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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