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와 인문의 느낌/철학 그 이론들

[스크랩] <푸른광장> 논술 교과는 없다.

daseut 2006. 11. 7. 20:15
<푸른광장>
논술 교과는 없다
논술 광풍이 불고 있다. 곳곳에 논술 과외학원이 생겨나고 서점, 서가는 논술교재로 채워져 있고, 거의 모든 일간지가 논술 특집을 거의 전면으로 연재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대학에서는 테스트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술을 상품화시키는 장사꾼들이 농치는 말들일 뿐이다. 논술은 어떤 과목이 아니다. 구두시험 친다고 할 때 구두가 없듯이 논술시험 친다고 할 때 논술은 없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수능 이후 모든 수험생들이 매달려야 할 지상의 수험 과목처럼 실체화돼 있고 권력화돼 있다.

당초 논술을 입시에 도입한 취지는 중등의 수동적인 주입식·암기식 지식교육을 능동적인 창의적·구성적 지혜훈육으로 바꿔놓기 위한 대학 측의 처방이었다. 취지는 좋았으나 거의 준비 없는 상태에 졸속하게 시행한 탓에 학생들이 혼란스웠고 교사들도 혼란스러웠으며 심지어 논술 출제 교수들조차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유독 논술과외 교사들만이 명석 판명한 태도로 자부심에 넘쳤다. 그들은 대개 제시문 파악의 3대 요령, 초안잡기 2대 요결, 논술문 작성의 3대 비결 같은 것으로 논술을 손바닥 안에 떡 주무르듯 해치울 수 있다고 목소리 높인다. 입시를 눈앞에 둔 학생들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너무도 분명한 것은 대학이 평가하고자 하는 것은 과외교사로부터 전수한 이런 요령으로써 갖추게 되는 글쓰기 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무엇 때문에 대학이 논술을 치려 하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글쓰기 능력이다. 글쓰기란 주어에 술어를 연결시키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창의적인 사고 과정이고 능동적인 생산 활동이다. 필기구를 쥐고 백지의 텅빈 공허에 마주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글쓰기라는 것, 첫 문장 하나를 그 백지 위에 적어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오랜 머뭇거림, 서성거림, 비틀거림 끝에 태어나는 경이로운 작은 기적 같은 것인지를. 그 모든 과정은 결코 글 뒤편으로 가뭇없이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것들은 반드시 영혼의 표피에 한겹 두겹 주름을 남기며 잠재의식 속으로 가라앉는다. 주어진 조건, 글,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관점을 정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한편의 독립된 글을 적어본다는 것은 이처럼 자기 존재의 내부와 외부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숭고한 행위다. 이런 흔적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무늬’(人文)라고 불렀다. 학문을 닦고 인격을 수양했던 것은 일생동안 아름답고 가치 있는 무늬를 남기려는 열망에서였다.

논술 출제위원장을 맡았던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지금 국내 대학의 모든 논술고사는 위장된 단답형 테스트에 가깝다. 아마 다수의 학생을 소수의 교수가 정해진 짧은 기간 안에 점수를 매겨야 하는 현 평가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이 파행은 계속될 것이다. 논술이라고 하면서 답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림에 정해진 답이 있는가. 노래에 하나의 답이 있는가. 그렇다면 마네나 고흐로 끝나지 않고 왜 세잔이나 피카소 등이 나타나며, 이미자나 조용필로 마감되지 않고 왜 서태지나 보아가 등장하는가.

논술의 본질부터 회복시켜야 한다. 학생들은 세 시간 이상의 충분한 시간에 분량 제한 없는 글을 써서 제출하고 양심, 책임감, 전문가적 능력을 갖춘 다수의 교수가 2개월 이상의 충분한 기간에 교차 채점하는 평가 체제를 어떤 식으로든 도입해야 한다.

글쓰기 예술의 비결은 무엇인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파이드로스가 물었던 이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현자가 되는 것”이라고 답한다. 맹자 역시 비슷한 물음에 “호연지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청소년 버전으로 말하자면 ‘충분히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흔히 하는 좋은 글쓰기의 충고, 즉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면서 중요한 요결이다. 너무도 원론적이라고?

그러나 왜 족집게 교사가 경멸하고, 다급한 학부모·학생이 무시하는 이 원론만이 유일한 요결인지는 오직 시간만이 증명해줄 것이다.

[[이왕주 / 부산대 교수·철학]]



view_setting();
기사 게재 일자 2006/11/02
출처 : 삶, 무의 존재 존재의 무
글쓴이 : daseu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