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관객과의 불화 |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은 존재의 의미’라고 주장했다. 존재는 시간 안에서 사건화된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역사가 그런 것이다. 한국 영화사에서 새 밀레니엄의 연대기는 분명 ‘빈집’을 감독한 김기덕에게 할애하게 될 것이다. 그의 존재는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역사화되어 갔던가. 지난 7일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열세번째 작품 ‘시간’의 시사회를 가졌다. 그 뒤 기자회견에서 그는 “‘시간’이 내 영화 가운데 한국에서의 마지막 개봉작이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스크린쿼터제 파동으로 가뜩이나 뒤숭숭한 이 시점에서 우리 영화계의 자랑이자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이 뛰어난 영화작가가 던진 발언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결기 서린 언어들을 토하게 했을까. 이유가 아리송하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빈집’ 개봉 뒤 저조한 흥행성적을 보면서 차기작의 정식 개봉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협박조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만일 ‘시간’의 흥행 결과가 좋지 않으면 앞으로 아예 한국에 판권 판매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한편 생각하면 오만방자함이 도가 지나쳤다는 느낌이다. ‘시간’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의 표현인가. 아니다. 느낌이 심상치 않다. 그 시사회가 자신의 제삿날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묻자. 무엇 때문에 그가 그런 벼랑 끝으로 스스로 나섰는가. 그는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한국 영화 관계자들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적이 있다. 영화 제작자들, 영화 배급업자들, 극장업주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홀대하는 것에 대해 강도 높은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침내 관객들에 대해서까지 그가 대립각을 세운 셈이다. 어쨌든 선언대로라면 이제 김기덕 감독은 국내 관객들을 등지고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한국인 스태프들로 한국 배우들을 써서 한국어로 이뤄진 한국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 관객들을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내부의 망명객. 이것이 이제 그가 받아들여야 할 고단하고 숨가쁜 운명의 삶이다. 이유가 어디 있든 간에 이건 슬픈 일이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약진하는 우리 영화계의 가장 빛나는 아이콘이다. 수백억원대의 펀딩으로 뛰어난 스태프들과 슈퍼스타들을 동원하여 영화 만드는 호사를 단 한번도 누려본 적 없어도, 이제 강아지 이름같이 되어버린 ‘관객 100만’을 한번도 달성한 적 없어도, 이 아이콘의 광채가 꺾여본 적 있던가. 대부분 구걸하듯이 모은 10억원 미만의 저예산으로 변변한 세트장 하나 없이 거의 무명의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독립영화처럼 만든 작품들로 세계 영화인들을 사로잡고, 또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요상들을 석권했다. 그때마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는 비켜갔지만 이것은 일종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런 그가 자칫 파국으로 갈 수도 있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기덕 감독에게 다음 두가지를 충고하고 싶다. 우선 이제 명성과 그에 걸맞은 카리스마를 갖췄으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영화판에서 처신하라는 것이다. 흥행기록에 일희일비하며 짜증스럽고 성마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더 이상 당신의 이미지에 합당하지 않다. 둘째, 한국 관객이라는 일반명사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수정하라. 여기에 남들이 우르르 몰려서 본다면 뒤질세라 따라 보는 부화뇌동의 관객들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의 작품에 마음으로부터 성원하며 갈채를 보내는, 소수의 열렬한 관객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이 글을 쓰는 나도 포함된다. 당신은 한국 배급업자에게는 판권 판매조차 거부함으로써 작품을 볼 기회를 기다리는 이 관객들을 일반명사로 싸잡아 내팽개쳐 버리려 하고 있다. 무슨 장르의 어떤 영화를 만들든, 관객 없는 영화는 생각할 수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이 태생의 동반자와 화해해야 한다. 시비하고 다투는 것도 그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관객 없는 영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왕주 / 부산대 교수·철학]] |
기사 게재 일자 2006/0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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