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메일 |
나는 작품 전시회 같은 데 가면 먼저 작품을 제대로 살피기 전에 제목부터 확인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더러 작품 제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내 경험법칙을 통해 말하자면 많은 작품들 특히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것들일수록 제목이 때로 작품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어떤 것은 그 기발한 제목 때문에 새삼 파닥거리는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조잡한 제목 때문에 시쳇말로 조져놓는 것들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작가의 창작 작업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마지막 붓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작품 밑에 적어넣는 순간에 완결되는 것이라 해야 한다. 어느 장르에서나 제목을 붙이는 품새를 보면 그 작가의 역량을 반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림 전시회 같은 데서 어쩌다 ‘무제’라는 제목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무제’도 이것을 제목으로 사용했던 첫 번째 작가의 작품 경우에는 제법 괜찮은 것이었으리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즉 ‘무제’를 제목으로 삼았을 테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제는 상투적인 낡은 수법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호명의 사회학’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숙고했던 철학자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였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당사자는 호명된 세계 안에서 특별한 위상에 배치된다. 영예로운 수상자든, 범죄 혐의자든, 아니면 통지서 수령자든 마찬가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호명은 어떤 존재를 무차별적 총체성으로부터 떼내어 고유한 것으로 단독화함으로써 하나의 세계 중심에 서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호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체화한다. 사람들의 모듬살이가 이뤄지는 생활 세계는 보편적인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다채로운 세계들이 짜이고 얽혀서 만들어지는 ‘관계의 복합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신의 이름만큼 살아가게 되고, 작품은 제목만큼 역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명의 사회학에 앞서 ‘명명의 계보학’을 말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 )는 한 편의 소설을 완성시키고 나서 제목을 붙이지 못해 한동안 참담한 심정으로 낑낑댔다. ‘수도원의 범죄사건’으로 했다가 ‘멜크의 아드소’로 했다가 어느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원고를 넘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명명을 유보한다. 피말리는 숙고 끝에 우연한 제목 하나가 섬광처럼 혼미한 그의 의식을 때리고 지나갔으니, 에코의 이름을 지구촌 인구에 회자시킨 밀리언셀러 ‘장미의 이름’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전말을 토로하면서 그는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독자를 조직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문열도 홍길동 이야기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소설에 엉뚱하게도 ‘홍길동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달았던가. 무릇 명명은 창조한 것들에 최후의 광채를 던지는 신성한 제의(祭儀)이다. 성경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한 신이 처음으로 보여준 행위는 빛과 어둠을 나누어 그 각각을 낮과 밤이라고 명명한 일이다. 그때부터 비로소 밤은 밤으로, 낮은 낮으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받는 e메일 중에 딱히 사무적인 것도 아니면서 제목이 없거나 제목이랄 게 없는 것들이 간혹 있다. 그런 e메일들은 적어도 내게는 빈 깡통 같이 느껴진다. 명명하는 숙고를 건너뛴 것은 그 내용도 건너뛸 수 있을 만큼 사소할 것 같다. 나는 한편의 짧은 메일이라도 제목 붙이기에 고심하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제목 하나를 궁리하느라 멈칫거리고 배회하고 서성거리는 이 시간, 명명의 계보학을 이런 방식으로 되풀이 실행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내가 모국어와 화해하는 경건한 의식(儀式)의 시간일 것이라 믿으며. [[이왕주/부산대 교수·철학]] |
기사 게재 일자 2006/08/31 |
출처 : 삶, 무의 존재 존재의 무
글쓴이 : daseu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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