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와 인문의 느낌/철학 그 이론들

<푸른광장>폭력의 세기

daseut 2006. 12. 21. 17:40
<푸른광장>폭력의 세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나는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선생님이 담임을 맡게 된 반에 편성되고서 한동안 밥맛을 잃었다. 모친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3학년에 진급해서 개학한 첫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내팽개치며 “이젠 학교가 지옥이야”라고 했단다. 모친이 가끔씩 상기시켜 주던 이 추억의 삽화를 들을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를 그런 공포로 몰아넣었던 정보가 어떤 식으로 천진난만한 의식 속으로 들어박혔는지가 궁금했다.

우선 선생님은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외모부터 험상궂었다. 그 선생님은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여느 선생님들처럼 무릎 꿇기나 손들고 서기 같은 벌을 세우는 일이 없었다. 반드시 체벌을 했다. 그 체벌 방식은 아주 단순했는데, 손바닥을 대나무자로 때리는 것이었다. 직전에 우리는 우선 눈을 감고 팔을 죽 뻗어 손바닥을 내밀어야 했고, 선생님의 대나무 자가 손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하나, 둘, 셋 매수를 헤아려야 했다. 이게 체벌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염라대왕이라는 섬뜩한 별명으로 우리 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저께 여주의 한 중학교에서 보여준 교사의 학생폭행 사건은 내게 체벌의 변천사에서 흘러간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월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먼저 그는 수업중에 자고 있던 피해 학생을 물총으로 물을 뿌려 깨웠다. 학생 한 명을 앞에 서게 한 다음 종이 부메랑을 만들어 그 학생의 머리를 맞히면 시험에서 1점을 주겠다고 했고, 물총 맞고 잠에서 깬 학생이 이런 수업 방식에 대해 항의하자 주먹으로 사정없이 두들겨팼으며, 학생이 교무실로 달아나자 쫓아가서 주먹과 발로 다시 폭행했다고 한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락 받고 달려온 학부모에게 폭언과 발길질을 했을 뿐 아니라 폭행 사실을 증언한 학생까지 두들겨팼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내가 어린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체벌과 위의 학생들이 교사로부터 당한 폭행은 비슷한 외양을 취한다. 어쨌든 교사가 학생에게 교실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신체적인 고통을 주었으니까. 그러나 체벌과 폭력은 아주 다른 것이다. 양자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매로 때렸는가 주먹으로 때렸는가, 교육의 이름으로 행한 것인가 분노의 감정에서 자행한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통이 있는가 없는가다. 다시 말해서 체벌이냐 폭력이냐를 가르는 결정적 척도는 언어가 개입해 있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한자로 벌(罰)은 ‘칼로 자르듯이 큰소리로 단호하게 꾸짖어 타이르는 말’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모든 말은 그 발화 양식에 상관없이 어떤 메시지를 담아 수신자에게 보내는 상징 기호들이다. 이런 이유로 말은 곧 호소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칼로 자르듯이 소리치는 체벌, 그것은 그 근본에서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을 하거나 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의 목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 모친은 염라대왕 선생님을 만나면서 내가 방과 후에 숙제하는 것을 습관화하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이것은 체벌을 통한 선생님의 호소에 대한 나의 응답이었던 셈이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분노가 때때로 동반하는 폭력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존재 상황이다. 그래서 그런 폭력에 제동을 건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성을 거세시키는 비인간화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만 보면 아렌트가 마치 폭력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으로 들릴지 모른다.

문제는 균형감, 정의감이다. 그것은 체득되고, 교육되고, 학습된다. 독재의 폭력에 대해 또다른 폭력으로 저항하며 민주화를 이룩하는 동안 우리에게 폭력은 마치 생활세계의 진리처럼 떠오르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가 영화 ‘친구’ ‘죽거나 나쁘거나’ ‘넘버3’ 등에 의해 폭력의 열정을 학습 받은 게 아니라 거꾸로 생활 세계의 진리로 부상한 폭력이 그런 영화를 낳게 만들었다.

조폭, 학교 폭력, 군대 폭력, 직장 폭력 등에 먼저 소리치는 칼같은 언어, 즉 벌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서 서로 소통하면서 꽃으로 혁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예술의 박자로 균형감각, 정의감각을 터득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이왕주 / 부산대 교수·철학]]



기사 게재 일자 2006/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