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훔쳐보기/한국의 일상들

[스크랩] 포퓰리즘(populism)

daseut 2006. 6. 25. 11:30

 포퓰리즘(populism)


포퓰리즘(populism:대중인기영합주의)

포퓰리즘은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한때는 ‘민중주의’라고 옮기기도 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온정적 접근을 추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민중’을 빙자하거나 사칭한 엉터리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을 경계한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영화 ‘에비타’에 나오는 주제곡이다. 애절한 곡조에 에바 페론이라고 하는 ‘전설적’인 여인의 한 많은 사연을 담은 이 노래가 슬금슬금 우리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에비타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페론 부인의 애칭이다. 그는 국민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페론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는 1946년 대통령이 됐다.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와 빈곤계층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페론은 9년 동안 권좌에 있다 실각하고 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지지는 식지 않아 1973년 다시 권력에 복귀하게 된다. 1년 뒤 죽음을 맞자 그의 또 다른 부인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76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페론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유산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오늘날까지 아르헨티나 정국을 좌우하는 큰 변수가 되고 있다.

▼권력획득위한 '개혁' 주창▼

흥미로운 것은 페론 또는 페론주의에 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다는 점이다. 다수 국민, 특히 빈곤 계층은 페론 시대에 대한 향수를 지우지 못한다. 반면에 식자층을 중심으로 그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에비타와 페론, 그리고 그들이 남긴 페론주의에 대한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아르헨티나를 망친 주범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라틴아메리카에는 제2, 제3의 페론이 많다. 이런 정치지도자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보여주는 정치행태를 흔히들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개념으로 형상화한다.

정치적 편의주의, 기회주의

포퓰리즘을 주도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언필칭 개혁을 내세운다. 그러나 말만 개혁일 뿐 실제로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을 획득하고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페론은 ‘정의’니 ‘제3의 길’이니 하며 화려한 수사(修辭)를 동원했지만, 실제로는 중심도 원칙도 없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적 편의주의, 다시 말하면 기회주의가 바로 포퓰리즘의 본질이다.

남미 대중들이 왜 이런 포퓰리즘에 열광했는가? 기회주의이기는 대중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수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돈도 없고, 일자리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계가 걱정이었다. 이런 한계적 상황에 내몰린 처지에서 길게 볼 여유가 없었다.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는 일보다는 즉각적으로 실리를 얻는 것이 더 급했다. 포퓰리즘은 이런 조급한 마음 속에 똬리를 틀게 됐다.

포퓰리즘의 지향점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물량공세가 시작되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돕겠다는데 누가 탓할 것인가. 저소득 계층의 임금을 올려주고 복지를 늘리는 각종 정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혜택을 보고자 했다. 아무도 손해보지 않는,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게 하는 것, 이것이 포퓰리즘의 지향점이었다.

▼선심정책만 판쳐서야▼

그런 마술적 ‘윈―윈 전략’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원리는 간단했다. 나라 곳간을 퍼내는 것이다. 에비타는 손을 벌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었다. 배고프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견디지를 못했다. 그러니 국민이 감격하지 않을 리가 있는가. 천사가 따로 있는가.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고통 없이 어떻게 미래가 있겠는가. 주인은 없고 객만 넘쳐나니 나라꼴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이대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감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면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마치 죽음의 묵시록처럼 우리 사회에 퍼져가고 있다. 정치인들로부터 기업인,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나라살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그리고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세태이니 이를 어쩔 것인가. 우리도 ‘에비타’를 노래해야만 하는가. 포퓰리즘이라는 유령은 이미 우리 옆에 바싹 다가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00/12/13 동아일보 [수요프리즘]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

     

    20세기초 아르헨티나는 세계 7대 부국(富國) 중 하나였다.

    넓고 비옥한 평원인 ‘팜파스’에서 밀 옥수수 귀리 등 농산물과 소 양 돼지 등 육류를 생산해 대서양 건너 유럽 각국에 식료품을 공급했다. 돈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이 나라를 ‘남미의 진주’라고 불렀다.

    100년이 흐른 지금, 아르헨티나는 만성적인 위기 발생국으로 전락했다. 외국인투자자들의 돈이 빠져나가면서 채무불이행 디폴트 선언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로 내몰렸다. 반면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북·서유럽의 작은 나라들은 외국자본의 투자 러시로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1세기 만에 남미와 유럽의 상황을 역전시킨 요인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이유는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의 남발로 재정상태가 극도로 취약해진데다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되면서 외채가 급증했기 때문. 고려대 어윤대 교수(경영학과)는 “세계 경제의 개방화 흐름을 외면한 채 자급자족형 폐쇄경제에 안주해 제조업 경쟁력을 키우지 못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며 “중남미 위기는 경제정책의 총체적 실패”라고 진단했다.


    ▽중남미 몰락은 경제정책 실패 탓〓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은 80년대 이후 위기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 구제금융을 받으면 구조조정과 재정 긴축에 나섰다가 경기가 살아나고 선거가 다가오면 슬그머니 개혁을 후퇴시켜 위기를 부르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82년과 95년에 이어 세번째 국가부도의 위기에 빠져 있다. 브라질과 멕시코는 공공부채가 각각 2400억달러와 1400억달러에 이르지만 외환보유고는 400억달러에도 못 미친다.

    정부가 국내산업 보호에 무리하게 집착한 것도 재정수지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각종 보조금과 관세 장벽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영 기업들을 감싸고 돈 결과 국가 빚은 빚대로 늘어나고 산업 체질은 허약해지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게 된 것.

    자국 산업에 대한 과잉 보호는 재정부담의 증가와 함께 ‘산업경쟁력 약화→제조업 기반 붕괴→교역조건 악화→경상수지 적자→금융 위기’로 이어지는 발단을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네덜란드 아일랜드 핀란드 등 유럽의 부자나라들도 80년대초 오일쇼크로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은 달랐다. 이 나라들은 ‘작은 정부’와 과감한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대표기업을 키우거나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한국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아르헨티나와 한국의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중남미 몰락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한국이 경제운용 메커니즘과 관련해 안고 있는 고민과 연결돼 있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부채가 급증했고 복지 노동 금융 분야의 재정지출 수요도 꾸준히 늘고 있다. 국가채무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23%로 선진국 기준에 비해 높은 수준이 아니라지만 국가 빚이 계속 불어나는 추세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제조업 경쟁력이 중국 등 후발국에 밀리고 기업들이 고임금과 각종 규제를 피해 생산 설비를 앞다퉈 해외로 옮기는 것도 심상찮은 대목. 어 교수는 “아르헨티나가 90년대 들어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린 것은 수출품 구조가 1차 산업에 편중돼 교역조건이 악화됐기 때문”이라며 “금융 건전성 못지 않게 산업기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정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부의 힘이 오히려 강해진 현상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중심을 잡되 모든 현안에 개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행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과거에는 정부가 앞장서면 웬만한 문제들이 해결됐지만 이제는 정부와 기업의 역할을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춰 재정립해야 할 때”라며 “해법은 기업 의욕을 살리는 쪽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2001.07.19

출처 : 얼바람
글쓴이 : 최성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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