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왜 기업이 문제인가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갔던 한 조선 청년의 기억
그때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김규형은 1943년 5월 어느 날, 고향인 충남 논산군 노성면에서 노성국민학교 건축공사 일을 하고 있었다. 문득 면장이 일본인 한 명과 함께 다가왔다. "야. 너 일본 가야겠다." 그 시절 징용 명령을 거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길로 규형은 일본 회사의 모집원이라는, 유달리 코가 컸던 그 일본인을 따라 논산군청으로 갔다. 군내에서 차출된 남자 55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저녁이 되자 일본인 모집원은 이들을 인솔해 논산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대전을 거쳐 새벽녘에 부산에 떨어졌다. 인근 여관에서 하루 지내고 다음날 저녁 배를 탔다.
부산(釜山)항에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운행하는 '관부(關釜)연락선'. 전국 각지에서 끌려 온 장정 3500명이 배 안을 가득 채웠다. 규형은 난생 처음 큰 배를 타고 정신없이 파도에 출렁이다 구토를 여러 번 했다. 사실 그는 바다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얼마나 걱정하고 계실까….
8시간쯤 지나 뿌옇게 섬 같은 것이 보였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였다. 상륙한 뒤 다시 기차를 탔다. 바깥을 내다보지 못하게 일본인들이 기차 창문을 시꺼먼 보자기로 가렸다. 객차 출입문마다 일본인들이 지켜 서서 조선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했다. 결국 도착한 곳은 규슈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가미야마다(上山田) 탄광.
일본 최대 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탄광이었다. 황국신민의 도리를 다하라는 훈시를 듣고 채탄 작업에 배치됐다. 다이너마이트로 발파를 하면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갱도 천장까지 들썩들썩했다.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했다. 매일 '도로꼬(탄차)'를 타고 막장으로 가 고된 노동에 몸을 던졌다.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고래고기, 아니 고기가 아니라 고래 내장을 사먹곤 했다. 돈 50전을 주면 노무자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인근 가게에서 고래 내장을 살 수 있었다.
툭하면 갱내에 가스가 차 작업이 중단되곤 했다. 가스가 찬 상태에서 곡괭이로 탄을 찍어대다 불꽃에 가스가 폭발해 사람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함께 일하던 전남 순천 사람 하나도 죽었다. 규형도 작업 도중 가스를 마셔 쓰러지고 말았다. 눈은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미쓰비시 탄광에서 일한 지 벌써 2년. 이렇게 지내다가 불 뒤집어쓰고 개죽음할 것 같았다. 다른 많은 조선인 노무자들처럼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회사 노무계 직원들이 극심한 고문을 가한다는 걸 잘 안다. 잔인한 구타는 물론 탄재를 섞은 시궁창 같은 물을 도망자의 콧구멍에 들이부으며 물고문을 가하곤 했다. 하지만 규형은 결심했다. 무지한 탄덩어리에 깔려 죽는 것보다는 낫지!
그는 탄광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와 산으로 줄달음쳤다.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는 사가현의 한 타이어 회사 공사장에 들어가게 됐다. 공장을 짓기 위해 매일 7t의 흙을 퍼 나르는 일이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다 징병 대상자로 지목돼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그는 86세다. 노쇠한 육신에 10여년 전 중풍까지 걸려 몸 왼편이 마비됐다. 그러나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갔던 무참한 기억은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화인(火印)같이 뇌에 각인된 것일까. 아마도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 기업은 조선인 노무 동원의 주범이었다
당시 기억을 재구성한 김규형 할아버지 이야기는 일제 시기 노무징용 피해자들의 무수한 체험담 가운데 지극히 평범한 사례에 해당한다. 국민일보가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측 자료를 중심으로 여러 문헌을 참고해 지난 석 달간 검토한 피해자 200여명의 구술기록 중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쓰비시 모집원에 의해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탄광 노동에 혹사당했던 고통이 과장 없이 담겨 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70여년 전, 조선인 수백만명이 김 할아버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 터전에서 뿌리 뽑힌 채 강제 노역에 내몰렸다. 치명적 부상과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거나 생명까지 잃은 희생자도 부지기수다. 이 같은 민족적 유형(流刑)을 강요한 가해 세력의 핵심에 일본 정부나 군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와 대등한 수준으로, 오히려 그 이상으로 조선인 노동력 수탈에 발 벗고 나선 세력이 일본 기업들이었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을 기폭제로 에너지 자원과 군수품 생산을 위한 노동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때 일본 정부 시책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강제 동원에 적극 나선 게 일본 유수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식민지 조선 청년을 활용하는 방안을 일본 정부에 강하게 권유했다. 일본석탄연합회, 토목공업협회 등을 통해 진정서도 냈다.
일본 정부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데 이어 이듬해 7월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일본) 이주에 관한 건'을 발령해 조선인 8만5000명을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연행할 것을 기업에 허가해줬다. 그렇게 해서 기업이 주체가 돼 조선인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길이 열렸다. 기업은 시종 일본 정부 및 조선총독부와 공모하면서 '모집' '관(官) 알선' '징용'과 같은 수법을 혼용해 조선 노동력을 확보했다.
모집의 경우 그 방식은 조선인을 고용하려는 기업이 신청서를 내면 조선총독부가 모집 지역과 인원을 결정해 기업에 할당해주는 형태였다. 할당 받은 기업은 본토 회사의 노무계 직원이나 모집 브로커를 조선 현지에 보내 면 단위까지 직접 훑어가면서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정을 잘 아는 조선인 면장이나 구장(지금의 통·이장), 일본 헌병 및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납치와 연행 등 폭력적 방법도 자주 사용했다.
관 알선과 징용 역시 정도 차는 있어도 기업 개입이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모집과 다를 게 없었다. 차출된 조선인들을 인솔해 개별 작업장에 투입하고 관리하는 일은 시종일관 기업 소관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38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까지 7년여에 걸친 강제 동원 기간 중 국내외에 노무 동원된 조선인이 연인원 700만명에 달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명임을 감안하면 숫자상으로 강제 동원 피해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게 노무 징용자들이다. 한반도 내 동원을 제외하고 일본 본토를 비롯해 만주, 사할린, 남태평양제도(남양군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 인력만 100만∼200만명이다. 강제 동원 기간에 사망한 조선인 노무자는 최소 20만명, 많게는 50만명으로 추정된다.
일본 기업 책임, 이제 분명히 가려야 한다
조선인 노무 동원의 주축이 일본 정부와 함께 일본 기업이란 사실은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일본 측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총 406개 기업이 조선인 동원에 나서서 일본 본토에서만 2400여개의 작업장에 투입했다. 일본인 노무자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수준이거나 아예 지급되지 않았던 임금, 조악하기 짝이 없는 식사와 주거 환경, 철야 및 장시간 노동, 구타와 고문이 기업의 의해 일상적으로 강요됐다. 게다가 기업은 조선인 노무자가 사고, 질병, 구타 등으로 사망했을 경우 유족에게 사망통지서를 보내거나 유골을 인계해주는 등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아 상당수 유족이 지금도 가족 유골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달리 일본 기업들의 전쟁범죄 책임은 늘 그늘에 가려진 채 정치·사회적으로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었다. 한국 측의 진상규명 요구에 대해 일본 정부는 흔히 "개별 기업에서 한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웠고, 해당 기업들은 강제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은폐하며 책임 회피로 일관해 왔다.
피해자들은 아직 생존해 있더라도 대부분 80, 90대 고령이다. 더 늦기 전에 역사적 정의와 진실을 밝히고 문제 해결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일본 전범 기업 관련 소송에 오랫동안 매진해 온 최봉태 변호사는 "해당 기업들은 강제 동원에 주도적으로 나서서 군수산업을 성장시키고 이익을 얻은 직접 당사자"라며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한편 미지급 임금을 현재 가치로 환산해 돌려줄 책임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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