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와 인문의 느낌

아스팔트 킨트의 찔레꽃 사냥

daseut 2006. 6. 5. 01:44




아스팔트 킨트의 찔레꽃 사냥

내가 내 속내를 말하며 가까이 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아주 친근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만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괴상함! 아니 모두 경험한 그 엄연한 추억과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나만이 모른다는 이 어처구니없음이 결국은 사냥길로 나를 내몰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묘사하는 언어들과 사이버 상에 드러나는 사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관념의 덩어리를 현존시켜야만 한다는 비화된 사명감을 안고, 말 그대로 찾아 헤매었다. '제1회 찔레꽃 망월장(望月場)' 공지를 본 후 처음에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만 이 풀, 저 풀, 이 나무, 저 나무를 그러고도 이것이다 하는 것이 드러나지 않자 초조함이 더하여 구조대를 요청했다. 인도자를 내세워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흙과 물을 볼 수 있는, 금정산 자락의 학교 안을 샅샅이 뒤졌다. 달밤에 더욱 아름답다 하여 밤길을 더듬어 헤맸지만 실패! 갑갑함에 오기가 더하여 본격적으로 꽃 사냥에 나섰다.

비 개인 오후, 흙냄새와 "분뇨냄새"를 혼돈하는 아이들에게 등을 보이며 국어 선생님은 칠판에 "아스팔트 킨트"라는 단어를 적었었다. 명확하지 않은 단어와, 자신의 애매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렀고, 목덜미에 찰랑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으로 자유를 의식하기 시작하며 조심스레 대학생활을 관망하고 있을 때였다. 대학써클 신입생 환영회 2차는 학교 앞 중국집 홍보석 2층에서 진행되었다. "우·짜?"라는 말에도, 선배들의 술안주로 배달되어 나온 "짬뽕!"이라는 말에도, 시끌벅적하던 그 들뜬 분위기에도 쉬이 동화하지 못하고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를 구경하듯 소리 없이 눈망울을 초롱일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노래 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술이 오른 선배 하나가 어느 여자 선배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러자 모두들 박수를 쳤고, 한사코 도래질을 하던 그 여자 선배는 마지못해 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지도교수님께 절대 말하지 않는다면 부를께요." 사람들의 환호성은 천장을 뚫고 나갈 것 같았다. 옆에서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선배라고, 유학 수속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난 클래식 밖에 모르니까, ... 찔레꽃!"
가곡에 빠져 연주회장을 찾곤 했던 나의 기대는 한껏 높아져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을 때, 선배가 부를 곡명을 말하자 사람들은 휘파람까지 불며 하나, 둘 젓가락을 들었고, 그 선배도 젓가락을 들고 상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흘러나온 노래는!

찔레꽃 붉게 물∼든 남쪽 나라 내 고∼향 ∼

애절하게 넘어가는 곡조에 사람들의 젓가락 장단은 흥을 더하고, 상이 부러질까 염려되는 마음까지 더하여, 나의 문화적 충격은 지금껏 그 흔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천박함이라는 지적 편견에, '클래식'이라는 개념의 혼돈에, 그래도 절로 돋는 몸의 흥얼거림이 뒤범벅된 혼돈이 찔레, 그 이름과의 처음 만남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도회지를 벗어날 때면, 붉은 꽃에 시선이 더하고 혹시, 저 꽃이? 그러다 주워 들은 정보에 흰색이라는.
그 이후로 그 선배의 노래도 들은 일이 없었고, 혼돈은 해결되지 않고 무의식에 잠재워져 있다가 아주 간간이 의심의 고개를 뒤밀 뿐이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 속에,

'아스팔트 킨트!' 나는 아스팔트 킨트임을 자인한다.
어릴 때 부모 손잡고 공원(公園)에 가서 꽃도 보고 우리 속 동물도 보았다. 교양으로 포장된 노래와 연극과 그림을 보고 교양으로 포장된 바다에서 수영하고 산을 타고 즐기면서 자연이라고 여겼다. 도회지에서만 자라 어른이 된 지금, 시골냄새를 안다고, 아파트 베란다 가득히 배열된 화분에 물을 주면 뿜어져 나오는 흙냄새와 교우하노라고 즐겼었다. 내 추억 속에 피어있는 각양의 꽃들도 많고 그 꽃으로 소꼽놀이, 목걸이, 시계 그리고 꽃잎 뜯어내며 영롱한 미래를 점치며 조잘거린 동무들도 있는데.
난 도회에서 나서 자랐지만 아스팔트 킨트가 아니라고 언연 중 내가 나를 쇄뇌시켰음을 내가 느낄 수 있음에랴. 내가 살고 있는 공간! 콘크리트로 칠갑되어 있고 그 속에서의 삶이 익숙한 난, 비오는 날 발이 젖는 것은 아주 싫다. 진흙탕에 내가 몰고 있는 차바퀴가 들어가는 것도 싫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사랑하노라고 하는 나는 공원(公員)임이 분명하다.

차를 타고 2시간 넘게 시골 마을로 찾아 들어가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들어 말라버린 6월초의 찔레의 모양새는 나에게 아무 감동도 줄 수가 없었다. 감자밭에 감자꽃만 열심히 감상하고 난 후, 좀 더 기온이 낮은 산마을 쪽으로 어영거리며 30분 가량을 이동하며 군데군데 찔레의 형체를 찾아내는 일은 이제 아주 익숙함이 되었다. 멀리에서도 눈에 잡혀오는 찔레의 존재는 명확해짐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아름다움에 감동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찔레꽃 그늘에서 찔레잎과 사귀고 있는 청개구리에게 마음이 흔들릴 뿐, 그렇게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자 신부 손에 들린 꽃부케 같이 드리워진 탐스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자태이다. 차를 세우자마자 바삐 내리는 나를 공격한 것은 향이었다. 콧대를 타고 순식간에 뇌리에 닿은 냄새! 찔레꽃 향! 장미보다 부드러운 그 향은 지금까지 오만함으로 찾아다닌 나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교양 있게 다듬어진 부케가 아니라, 멋들어진 선을 드리우고 실존하는 꽃무더기! 세상 어떤 곳으로도 자유로이 뻗어가는 노마드! 내 코를 자극하는 내음은 시물라크라일 수 없다. 관념의 덩어리가 그 실체를 드러내며 내 삶 속에 현존하게 될 때 나는 그와 동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햇빛과 습기 머금은 흙이 있으면 어디에서나 자란다고 하는데, 아마 내 삶의 공간 어느 곳을 에두르며 살고 있었으리라. 서로의 세미오시스가 작용하여 만남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찔레라고 불러주고 그에 화응함에 나의 찔레꽃이 될 수 있음이다. 公員인 아스팔트 킨트의 자만심에 더할 교양의 가치로서는 존재를 보여주지 않은, 그래서 만남의 의미를 되새김질시키는, 더 깊은 인연을 노래하고 싶게 하는 찔레꽃, 아스팔트 킨트는 사냥할 수 없는, 아니 어쩜 그 누구도 사냥할 수 없을 그 자체 존재하는 찔레이다. 和而不同의 동무다. 한참을 더불어 시간을 보냈다. 이쪽 저쪽 애무하듯 LCD 화면에 비추이며 오랫동안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안녕을 속삭였다. 약속 없이 헤어짐이지만 다시 만날 것을 의심하지 않고 행복하게 떠나 가벼웁게 아스팔트 킨트의 공원(公園)으로 향했다.
이래서 나는 만어산 입구에 찔레꽃을 남겨 두고 도회의 아파트에 돌아와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보고픔이 진하여 내 발길이 다시 그 곳을 찾을 때 반드시 더 그윽한 향으로 나를 아름답게 맞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내 마음에 자리하게 하는 찔레꽃, 너와 나는 동무되었음이 명확하다. 사진기 가득 담아 온 시물라크라를 보며 나는 네 향을 의심하지 않으며 기억할 수 있다. 내 속에 존재하는 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