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seut 2006. 2. 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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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부를 뛰어 넘어

마론 인형 같던 <킹 콩>의 연인을 벗어나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영화는 뭐니 뭐니해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이다. 그녀는 아직은 머리숱이 많은 잭 니콜슨과의 이 아슬아슬한 치정극을 통해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베스트로 꼽히는 부엌에서의 정사장면은 십 수년이 지난 지금 봐도 아찔하다. 하지만 이를 앙다문 듯 각진 턱과 금방 에어로빅 비디오에서 튀어나온 듯 단단한 근육을 가진 제시카 랭은 이 영화에서 육체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다. 늙은이의 부인으로 도시의 중턱에 놓인 외진 주유소에 갇힌 거칠고 절망적인 여자가 낯선 이방인을 통해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제시카 랭은 강하면서도 섬세하게 보여준다. 정부와 남편을 죽여버린 요부가 아니라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은 그녀의 섬세한 미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주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각인시킨 그녀는 실제 여배우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 차기작 <여배우 프란시스>를 거치면서 현명하게도 그녀의 금발 머리의 끝자락에서 아슬아슬하게 따라오던 섹스 심벌의 이미지를 탁 내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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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금만 풀어내면 허공을 향해 들 떠 보이는 묘한 눈동자와 금발 머리, 앙다문 듯 각졌지만 우아해 보이는 턱선에서 여자로서의 매력을 지워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 한번도 둥글고 얇게 뻗어 내리는 라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녀의 몸은 더할 수 없는 건강미를 뿜어낸다. 이 묘한 불균형이 몇 편의 영화에서 그녀의 아우라를 더욱 크게 만들었고, <알렉 볼드윈의 욕망의 열차 A streetcar named desire>(1995)에서 이 묘한 매력은 극대화된다. 비비안 리의 동명의 흑백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에게 제시카 랭은 정말 블랑쉬 답지 않다. 낡은 귀족 인형같은 비비안 리는 손만 대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쇄락한 남부처녀로서의 블랑쉬를 교과서처럼 가감할 수 없는 인물로 각인시켜 놓았고, 제시카 랭은 비비안 리를 뛰어넘어야 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여성이 희망의 끈을 놓고 와르르 무너지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그녀의 단단한 육체는 막 시들기 시작한 여체의 아쉬움을 담은 채 하나의 배경이 되어 극을 흐른다.

그녀에게 아카데미 상을 안겨준 <블루 스카이>에서 마릴린 몬로가 되고 싶은 방탕한 부인으로서 제시카 랭은 그녀가 가진 묘한 여성미를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마릴린 몬로를 흉내내는 바닷가의 제시카 랭의 모습을 보라. 바디 라인을 최대한 강조한 옷으로 섹시함을 강조하고, 비음 섞인 목소리는 무게없이 남자들을 유혹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영화에서 제시카 랭은 내내 융화되지 못한 채 불안하게 겉도는 것 같다. 하지만 섹시함과 죄악으로서의 여체의 언저리에서 맴돌던 그녀의 연기는 철없는 여자에서 가족을 위해 투쟁하는 여인으로 변신하면서 신기하게도 제자리를 찾는다.

여자라서 아름답고, 엄마라서 강하다

그다지 유명하진 않지만 그녀의 이름을 걸고 출시된 <제시카 랭의 모정 Loosing Isaiah>은 그녀의 팬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제시카 랭이란 배우가 가진 매력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른 엄마와 낳은 엄마의 법정 싸움을 그린 이 영화에서 섬세하고 따뜻한 여성이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강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자를 벗고 엄마가 되는 그녀는 영화에서 가장 그녀다우면서 항상 당당하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뮤직 박스>에서 아들에게 부끄러운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고발하는 변호사로서의 제시카 랭의 모습은 두고 봐도 묵직하게 중심이 서 있어서 멋지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영화 속에서 튀지 않고 제 몫으로만 얘기하는 그녀의 매력은 1류 여배우들과의 앙상블 영화 <마음의 범죄>와 <1000 에이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세 자매의 일상을 통해 여성의 문제를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제시카 랭은 각각 다이앤 키튼과 씨시 스페이식, 제니퍼 제이슨 리와 미셸 파이퍼와 호흡을 맞춘다. 여배우의 면면만으로도 시각적 쾌감을 주는 이 영화에서도 제시카 랭의 몫은 분명하다. 영화의 중심에 서 있지만 이야기의 중심으로 솟아오르지 않게 호흡을 누르면서 배우들을 이끈다.

결국 제시카 랭은 캐릭터 보다 스토리가 강한 드라마에 잘 어울리는 배우다. 그래서 <블러드 라인 Hush>에서 아들에게 집착하는 미치광이 엄마로서 부실한 두 주연배우의 몫까지 짊어졌던 그녀의 광기어린 모습은 부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안타깝기까지 하다. 도무지 설득력이 없는 미치광이 엄마의 모습이 애초 그녀에게 어울리는 옷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도저히 힘겨루기를 할 수 없이 약한 기네스 팰트로와는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올가미>라는 정의는 그 부실함에 견준다면 더할 나위없는 좋은 비유가 되었다.

그랬던 그녀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다. 50를 훌쩍 넘어버린 그녀가 여자로서의 캐릭터에 욕심이 났을까? <블러드 라인> 이후 연이어 찍은 두 영화에서 팜므 파탈의 서릿발 선 요부로 돌아왔다. <베티>에서는 좀 약했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타이투스>에서 치명적 팜므 파탈로서 그녀는 여전히 독기어린 뱀 같은 매력이 남아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샤론 스톤처럼 털(?)로서가 아니라, 미간을 추켜세운 눈빛으로 섹시한 마력을 뿜어내는 제시카 랭의 매력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여자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섰을 때 더 아름다운 걸 어쩌랴? 그녀는 앞으로 어떤 영화에서 특유의 매력을 선보이게 될까? 열혈 팬으로서의 심장 뛰는 두근거림 없이 그저 묵묵히 기다려봄이 어떨까? 요란 떠는 일 없이 어느 날 펼쳐든 신문광고에서 다른 유명 배우들 이름과 함께 써 있는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날이 올 것이다. 혼자 나서는 법 없이, 또 자신을 한정 없이 뛰어넘겠다는 과욕도 없이 그녀는 언제나 늘 영화와 함께 우리 곁에 있을 터이니...

P.S
1.
<여배우 프랜시스>는 그녀의 오랜 연인이자 유명한 배우, 극작가인 샘 셰퍼드와 처음으로 공연한 영화다. 제시카 랭의 빼어난 연기와는 별개로 다소 지루하고 거친 흐름의 이 영화에서 가장 불필요해 보이는 역할이 바로 샘 셰퍼드가 연기한 해리다.
2. <제시카 랭의 모정>에서는 지금은 유명 스타가 된 쿠바 구딩 주니어와 할 베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3. <프랜시스>를 필두로 그녀의 오랜 동반자 샘 셰퍼드는 <Country>(1984 미개봉 미출시), <마음의 범죄>(1986)에서 배우로, <Far North 미개봉 미출시>(1988)에선 감독과 배우로 만났다. 기회가 된다면 세기의 지적인 커플의 호흡을 확인해 보자.
4. 흥행영화를 찍지 않은 만큼 국내 미출시, 미개봉작이 유난히 많다. 크리스티나 리치, 앤 헤이시, 조나단 라이 마이어스와 공연한 <프로작 네이션>(2001)과 밥 딜런, 죤 굿맨, 루크 윌슨, 페넬로페 크루즈에 제프 브리지스, 안젤라 바셋이 공연했다는 <마스크트 앤 어노니무스>(2003)는 반드시 기다려봐야 할 영화일 듯.

글 : 최재훈 noldory@cine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