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간 적대적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철학계와 도덕교육학계는 이른바 대연정을 이뤄냈다. 기존의 서울대 국민윤리학과에서 마련했던
도덕교육과정 시안과 교과서 편찬이 교육과정평가원으로 넘어감에 따라 학계와 현장 교원의 다양한 의견수렴이 가능해진 일.
작년 중순까지만 해도 철학계의 공세와 도덕교육학계의 수세적인 입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철학계는 현행 교과내용이 전두환 정권시절에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낡은 국가이념을 그대로 강조하고 있으며, 사회과학적 서술로 인한
일반사회교과와 상당부분이 중복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모학문에 대한 문제제기와 현장교사들의 개정 요구를 내세워 도덕교육학계를 압박했고, 이에
맞서 윤리학계는 도덕교육의 경험을 내세워, 현실을 고려치 못한 지나친 감상주의와 특정공동체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보편성은 극복돼야하며,
윤리학만이 아닌 학제간을 통한 도덕교육이 바람직하고, 개인의 자율성에서 공동체중심으로 전환한 미국의 도덕교육 사례를 바탕으로 방어를 취했다.
하지만 윤리학계에서 교과서상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철학계는 도덕교육학계의 경륜을 인정함으로서 타협이 이뤄졌다. 또한
교육혁신위원회에서 과목 수 축소방안이 제기됨에 따라 발생한 위기의식이 타협을 이루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에 보고될 이번 개정시안
작성은 교육과정평가원 내의 도덕교육연구원과 도덕교육학계, 철학계 교총 등에서 참여해 만들어졌다. 지난 12월 공청회 자료집을 통해 공개된 시안은
철학계의 의견이 대폭 수용돼 국가·통일·안보가 삭제되거나 축소되는 반면, 도덕적 자율인 양성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조난심 한국교육평가원 교수학습연구본부장은 “다양한 의견이 조화롭게 조절되고 있어, 현재 2/3정도 수정·보완된 상태이다”라며
개정시안 작업 분위기를 전한다. 한국교육평가원 책임연구원으로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초기 개정작업을 이끌었던
차우규 한국교원대 교수(윤리교육)는 “참여폭이 제한적이었던 예전에 비해 여러단체의 의견을 조율해 만든 차별화된 작품”이라고 말하면서도 “문구
하나하나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회의 끝까지 간 적도 많았다”라며 의견 수합이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개정시안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철학교육연구회 회장 손동현 성균관대 교수(형이상학)는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철학계와
도덕교육학계에서 가교역할을 했다. 손 교수는 “국가와 민족, 사회적 현상에 대한 관점이 사회과학적 해석에서 윤리학적 접근으로 상당부분 변화를
이뤘다”고 전한다.
작년 국민윤리학회 회장이었던 박효종 교수(정치이론)는 “과거 윤리를 담당했던 경륜과 철학자의 지혜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 같다”고 흐름을 짚었다. 철학계와 도덕교육학계는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박찬구 서울대 교수(윤리학)는 “전통윤리사상이 배제돼 아쉽지만
철학적 기반에 입각한 이번 시안의 전체적인 방향은 바르게 진행된 것 같다”라고 견해를 밝힌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와 함께 철학교육 개혁에
앞장섰던 홍윤기 동국대 교수(사회철학)는 “기존 교육의 문제 앞에 철학계와 윤리교육계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한 대표적 사례”라며 반긴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변화폭이 컸던 개정시안에 따라 대학 커리큘럼 수정이 불가피하고, 철학과의 교직문제,
개정시안의 일부 해석 논란 등의 과제는 남아있다.
하지만 양 학계가 이미 여진을 인식하고 서로를 배려한 가운데 일부분 합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번 개정시안이 내년 검정교과서 전환과
함께 교육부의 승인이 된다고 해도 2010년 후에나 교육현장에 시행되기 때문에, 기존의 지각변동에 따른 후유증은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도덕교과서 문제는, 격렬한 논쟁이 건설적 타협으로 이어지고, 실질적인 대안이 생성되면서 학계의 유례없는 모범적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올해는 지난 타협과정에서 잔존한 불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이어온 성과에 명암이 나뉠 것으로 보인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