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와 인문의 느낌/철학 그 이론들

싸워야 할 싸움

daseut 2005. 7. 9. 00:20
뉴스홈 > 칼럼 > 전체기사 [시론] 싸워야 할 싸움 /이왕주 [국제신문] 2005/07/05 21:26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라. 우리 삶이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했을 때, 이 말은 나름의 적실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한 싸움판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말을 거꾸로 뒤집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려라.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싸움이란 얼마 전 매스컴 문화란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배우와 감독들의 싸움이다. 얼핏 보면 이것은 개런티 때문에 감독과 배우 사이에 벌어진 싸움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내막은 간단한 게 아니었으니 여기에는 여러 집단의 해묵은 이해가 복합적으로 얽힌 대리전적 성격이 깔려 있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싸움의 당사자는 감독과 배우가 아니라 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였다.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전속 스타 배우들을 거느리면서 배역의 캐스팅, 개런티뿐 아니라 이익의 지분에까지 관여하려 드는 매니지먼트사가 몹시 못마땅했고, 매니지먼트사는 재능 있는 배우를 발굴하고 그들을 키워서 스타로 만들어, 이런저런 작품의 배역을 소화하고 흥행에 성공하도록 해주는 데다 온갖 궂은 일을 헌신적으로 떠맡는 자신들의 공적에 대해 인색한 제작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품었던 적의가 감독과 배우의 대리전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이 싸움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사가 편한 것은 아니다. 한국 영화의 약진이 세계 영화계의 부러움을 사는 이 때, 국제 영화시장에서는 적어도 자국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제압하는 한국 영화를 마치 골리앗에 맞서 싸워 이긴 다윗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때, 영화산업의 본산지인 미국이나 프랑스의 대학, 연구소에서 한국 영화학이 강좌로 열리고 한국 영화주간이 생겨나는 등 또다른 한류가 구미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 때, 그 주역들이 꼭 이런 식으로 서로 싸워야 하는가. 우려하는 시선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고, 지금 막 필요한 시점에서 때 맞추어 잘 불거져 나왔다. 잘 나간다는 한국 영화. 아직은 소프트웨어의 수준에서 할리우드와 균형을 맞춰나가고 있는 것일 뿐, 더 까놓고 말하자면 작품 몇 편의 흥행성적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앞지르고 있는 것뿐이다. 만일 흥행작의 명맥이 끊어지면 '할리우드를 누른 한국 영화'는 하나의 환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 방화계는 이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하드웨어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영화산업의 구조는 스크린 쿼터제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하던 시절에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창작과 배급은 주먹구구식이다. 영화판의 이런 체질 개선에는 관청에서 규약으로 해결할 게 있고, 당사자들이 사이 좋게 골프나 치면서도 합의할 게 있으며, 또 어떤 것은 박 터지게 싸워서 해결할 것도 있다. 나는 배우와 감독의 대리전으로 표출된 이번 싸움은 싸워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국 영화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 권리 그리고 한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어정쩡하게 말리거나 서둘러 봉합시키려 하지 말고, 뭔가 결말을 명확히 지을 때까지 치열하게 싸우도록 부추겨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싸움은 언젠가 결말이 나게 마련이고, 싸우는 동안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두고 쌍방간에 결산을 해볼 것이다. 당사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쌍방이 몰락할 때까지 어리석은 싸움을 계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 멈춰선 지점에 형성된 전선을 서로 존중해야 할 상대의 영역으로, 각자 역할, 권리, 한계의 가이드라인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확신컨대 그 가이드라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흥행만을 추구하는 제작자, 감독들을 견제할 것이고, 손쉬운 스타 시스템에 의존해서 안주하는 배우, 기존 인맥만을 지겹게 가동하며 신인발굴에 게으른 매니지먼트사를 걸러낼 것이다. 누구든 성숙하려면 상처의 기억을 간직해야 하고 상처를 얻으려면 먼저 온몸을 던져 싸워야 한다. 부산대 교수·윤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