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훔쳐보기/영화읽기

사랑도 매혹도 아닌

daseut 2005. 6. 25. 00:07
사랑도 아닌, 매혹도 아닌
[시네마 키워드] 중년의 애정 중독 혹은 섹스 중독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프랑스 영화 <권태>  
지켜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나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나이. 중년은 운신할 폭이 넓지 않다.
이런 중년의 사랑을 다룬 영화라면 어떤 내용일까? 예측 가능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불륜의 원죄를 상쇄할 만한 원숙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그리는 것이다. 새로운 사랑이 필요한 필연적인 이유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면 중년의 사랑도 제법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대상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이다. 누구도 뿌리칠 수 없는 관능미를 소유한 팜므 파탈은 중년의 외도를 변명할 수 있는 효과적인 설정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로리타 콤플렉스를 소재로 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인> 역시 원죄를 여주인공의 관능미에 덮어씌운다.

프랑스의 주목되는 감독 세드릭 칸이 연출한 <권태>는 중년의 사랑에 대한 이 두 가지 기본 코드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중년의, 그것도 철학 교수인 남자 주인공은 사춘기 소년처럼, 발정한 수캐처럼 여자 주인공을 뒤쫓고 게걸스럽게 섹스에 매달린다. 그렇다고 여주인공이 그다지 관능적인 것도 아니다. 17세의 누드 모델로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소피 길맹은 팜므 파탈이 되기에는 너무나 둔한 몸매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권태로울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들

<권태>의 원작은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소설이다.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역사의 변화를 추동한 것이 인간의 권태일지 모른다는 ‘정치적 권태’를 다루었지만 세드릭 칸의 영화에서 권태는 다르게 해석된다. ‘권태’라는 영화 제목은 다소 역설적이다. 내용을 중심으로 제목을 붙인다면 ‘집착’이 더 맞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 편집증적인 중년 철학 교수 마르탱은 권태로울 정도로 세실리아에게 집착한다.

마르탱의 집착은 소유욕에서 비롯한 것이다. “너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넌 평범한 여자야. 아마 좋은 아내가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세실리아에게 눈물겹도록 매달린다. 수시로 뒤쫓고 숨 돌릴 겨를 없이 전화를 해대고, 연락이 안 되면 지칠 정도로 알리바이를 추궁한다.

다소 맹해 보였던 세실리아는 우문현답을 통해서 문제를 소멸시켜 버린다.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다른 남자 친구가 있다고 의심하고, 추궁하고, 헤어지라고 종용하는 마르탱에게 세실리아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당신이 그와 잘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발기되는 마르탱의 성기를 받아내는 세실리아의 거대한 자궁은 논리와 이성으로 구축한 서양 철학의 성체를 직관과 감성으로 해체한 동양 철학의 포용력을 연상시킨다.

   
  박철수 감독의 <녹색의자>  
유부녀와 남자 고등학생의 ‘역원조교제’를 다룬 영화 <녹색의자>(연출 박철수)는 <권태>와 정확하게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는 영화이다. 중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지친 여자 주인공 문희(서정 분)가 남자 주인공 현(심지호 분)을 만나 섹스에 눈을 뜨게 한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려주고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가르치며 그와의 밀애를 즐긴다. 그러나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 차이 때문인지, 박철수 감독은 세드릭 칸과는 다르게 풀어냈다.

<녹색의자>는 역원조교제의 후일담이다. <녹색의자>는 유부녀와 남자 고등학생이 만나 역원조교제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 석방 이후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그런데 끝없이 집착하고 붙들고 결혼하자고 매달리는 마르탱과 달리 문희는 어떻게든 현을 내치려고만 한다. 내치고 들이고를 반복하며 영화는 나름으로 ‘성해방’을 향해 달린다.

문희가 현을 보내려 하는 이유는 그를 소유할 수 없다는 회의 때문이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뿐만 아니라 현의 젊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내것을 만들 수 없다는 그녀의 불안은 그가 자신을 데리고 놀았다며 자학하게 만들고 심지어 함께 사는 친구와의 관계를 의심하게도 만든다.

<권태>에서처럼 <녹색의자>에서도 나이 든 연인의 병증을 치료하는 사람은 바로 젊은 연인이다. 현은 나이 든 연인의 투정을 묵묵히 받아내며 모두를 초대한 성년 파티에서 문제들을 해소함으로써 해결을 도모한다. 세실리아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소유가 아닌, 그냥 그대로 좋은 그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중년의 위태로운 자아는 결국 젊은 연인의 성기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이런 내용적 차이에서 뿐만 아니라 <권태>와 <녹색의자>는 완성도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권태>가 낯선 프랑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사고 빠져들게 만드는 반면 <녹색의자>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관객을 멀어지게 한다. <녹색의자>는 문제작이 되기에는 질문이 불분명하고 대중작이 되기에는 영화적 재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다.  

 

[818호] 입력 : 2005년 06월 20일 10:57:50 / 수정 : 2005년 06월 21일 08: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