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훔쳐보기/영화읽기

[스크랩] 철학, 영화를 Casting하다/이왕주---- 천영애 시인

daseut 2007. 8. 11. 14:22
 철학교수가 아줌마 부대를 끌고 다닌다는 소문을 일찌기 들었을 때, 지적 호기심에 목마른 아줌마와 대중적인 철학교수와의 코드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겠거니 했다. 그 철학교수가 영화도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유행 타고 있구나'쯤으로 해석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내내 미안했다. 어느 한 개인에게 마니아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의 독특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 이 책의 저자인 이왕주 교수는 그렇게 다가왔다. 철학교수에게 있다는 마니아들, 아줌마들.

 

  철학이 대중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반갑다. 엄숙주의에 물들어 있던 철학이 스스로 몸을 낮추고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하고 그것과 접선한 사람들이 철학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현재 인문학의 위기니 뭐니 하고 떠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학문이 자신의 성안에서 고고한 소리를 내어야 진정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의 대중적인 철학 인식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안에 들어서지 못한 사람 역시 그들의 철학이 부담스럽다. 그러므로 학문이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철학, 이라고 떠올리면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현란한 말들을 해석해 내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것이 삶의 진정성을 말한다 하더라고 철학이란 이름으로 말해지는 것은 일단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철학과 영화의 만남은 그런 어렵고 부담스러운 감정을 일소에 들어낸다. 영화를 어떤 시각으로 해석해 내느냐는 각자의 취향대로다. 그야말로 '타인의 취향(아네스 자우이 감독 1999년)'이므로 간섭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철학자 이왕주는 '타인의 취향'이란 영화에서 공자의 '화이부동'을 읽어낸다. 그가 해석하는 '화이부동'이란 "타자와 차이를 갖되 같아지려 하지 않고, 타인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조화를 이루려는 삶의 태도"이다.

 

  한때 배우 브래드 피트에 몰두한 적이 있다. 영화 '가을의 전설'과 '흐르는 강물처럼'에 나오는 이목구비가 수려한 배우, 너무 잘 생기고 감성적이어서 매료되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로버트 레드퍼드 감독. 1992년)에 나오는 둘째 아들 브래드 피트는 왼손잡이이다. 철학자 파이어아벤트는 <시간 죽이기>란 자서전에서 "예술은 모두 왼손에서 탄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왼손이 상징하는 것은 정통, 원리, 규칙, 주류, 본질, 근거등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를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아우 브래드 피트는 오른손잡이, 정통파, 백인 우월주의자, 부자, 아버지, 형, 권위, 제도, 도덕, 관습등에 분노, 눈물, 열광, 격정 등의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으로 맞선다. 그가 죽은 방식도 왼손이 무참히 으스러지는 것이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낚시 방식인 메트로놈의 네 박자를 거부하고 '그림자 던지기'의 낚시를 하며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한 바로 그 왼손이었다.

 

  이왕주는 철학과 영화의 접속을 통해 철학을 쉽고 편하게 해석해 낸다. 모호하던 포스트 모더니즘을 작가는 '슈렉'이란 영화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려면 내숭이나 떨며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얌전히 처신하기보다 때로는 난폭하고 무례할 정도로 제도나 규칙의 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 볼 이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규칙을 깬다거나 딴죽을 건다는 뜻이 아니라 틀 안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바깥의 자유를 고수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슈렉을 통해서 스스로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간으로 규정지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을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간으로 구분하는 내밀한 즐거움도 맛보았다.

 

  갑자기 유행의 반열에 들고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기계', '접속' 에 대해서도 쉬운 설명을 내린다. 가령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손이란 기계로 독자들과의 접속을 시도하므로 손은 소통의 기계로 환원될 수도 있겠다. 소통은 다시 화해의 '계열'을 따라 확장된다.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감독. 2005년)'를 통해 해석되는 들뢰즈의 '기계되기'는 내가 지금 어떤 네트워크의 플러그에 꽂혀 어떤 기계로 작동되는지, 내 행위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한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장자의 '무위'사상으로 해석해 낸 '와호장룡(리안 감독. 2000년)'은 텔레비전에서 몇번 본 것 같은데 집중해서 보지 않고 오며 가며 보는 바람에 늘 내용이 모호했었다. 그러나 작가는 장자의 '포정해우(소를 잡는 것과 소를 푸는 것)'을 통해 검객 리무바이의 검술을 설명한다. 기가 막힌 해석이다. 리무바이와 용의 최후의 결전장이었던 대나무밭에서의 무술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나무 숲을 타는 검객은 대나무 숲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휘어지는 대나무의 결과 켜, 탄력과 반동에 포정의 칼처럼 거스름 없이 스며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람에 대나무가 누울 때 같이 누워야 하고 일어설 때 같이 일어서야 한다. 리무바이의 몸놀림은 온전히 대나무와 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리무바이는 죽림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 자유로움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용은 대나무가 누울 때 일어서려 했고 일어설 때는 몸을 굽혔다. 그녀는 대나무와 하나가 되려 하지 않았고 그저 대나무를 이용하려 했다"

 

  흔히들 깊은 학문이라고 말하는 철학과 얕은 예술이라고 하는 영화의 만남은 들뢰즈의 표현을 따르자면 철학의 '노마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맥락들에 플러그를 꽂기 위해 네트워크의 표면위로 바람처럼 자유롭게 미끄러지고자 하는 철학, 그런 의미에서 철학과 영화의 만남은 "기계로 되어감(사건)"이다. 노마드는 탈주하는 자다. 바람처럼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는 자유자재의 몸으로 전방위로 탈주해 가는 이왕주의 철학을 나는 '노마드 철학'이라고 칭하고 싶다.

                                                이왕주 저. 효형출판((2005년). 13,000원

 

출처 : 최춘해 아동문학 교실
글쓴이 : 김현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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